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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 호흡이 멈춘 밤 생각보다 아주 이른 시간에 불꺼진 시골 모퉁이처럼 한 사람이 갔다 마치 전등에 불을 끄듯 간단명료하게 그를 한참동안 생각했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때 그이가 내게 퍽 다정했나 서먹했나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었나 같이 웃으며 걸었던 적이 있었나 다정하게 그를 불렀던 기억이 있나 한 개인이 아니 하나의 어떠한 것이 사라지기 전 나는 그것에 대하여 숙고한 적이 있는가 돌아가는 것 앞에 명분을 찾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한번도 반추한 적이 없는 이는 옛 것에 명복을 빌 자격이 없다 단지 죽는 순간까지 돌아본 그 날을 기억하며 살 뿐 호흡이 멎은 어두운 밤 굳어버린 공기와 뻣뻣한 비보 해가 진 후 번지는 낙조처럼 가장 아름다웠던 그 이름을 18.08.06 비보를 듣습니다. 한 사람의 소식입니다. 더는 들을 수 없..
#15. 글, 자정 습관적으로 놓치는 것들이 많아졌다. 손톱을 깎다 조금 전 생각을 같이 깎아버린다든지, 차에 우산을 넣어두고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한다든지 눈앞에서 놓친 지하철처럼 멀뚱거리는 순간이 잦아졌다. 생각이 생각을 따라가다 잊은 목적지처럼 끔뻑이는 장면이 하루를 자주 채운다. 화들짝 켜지는 시동처럼 놓치는 시간, 고개를 푹 숙인 것들의 등을 자주 마주한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순간은 삶이 내게 주는 신호 버린 줄 알았던 깎여나간 것들의 면면을 밟았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게 부어도 차지 않는 헛헛함 이제는 관성이 된, 등을 마주하는 일 잘려나간 순간과 잊혀진 것들의 소리가 왕왕 한없이 커지는 밤이다. https://www.instagram.com/p/B2g7nOWF2IC/?utm_source=i..
#13. 한 사람의 야욕이 앗아간 두 사람의 생(단종, 정순왕후) 동망정입니다. 동망정, 동쪽을 그리하던 정자.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저는 조금 좋아하는 편입니다. 역사는 알게 될수록 매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먼저 산 사람들은 이럴 때 이런 선택을 했다는 이야긴데, 어른들 이야기를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처럼 지식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정보가 아닌 그 안에 숨어있는 지혜를 나타내기에 그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역사도 관상과 사주, 때로는 손금처럼 오랜 시간 쌓인 정보를 통해 미래를 앞서 본다는 점에서 맥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숭인근린공원입니다. 동묘역 2번 출구에서 좌우를 살피다 보면 봉우리가 하나 보입니다. 바위산처럼 우두커니 있는 봉우리인데, 그곳이 숭인근린공원입니다. 길이 가파르..
#12. 글, 손톱 조각 한없이 사랑을 주어본 사람은 안다 무언가를 주고도 더 줄 수 없어, 줄 것이 없어 그저 미안한 끊임없이 사랑을 쏟은 사람은 안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람에게 진정 사랑을 쏟은 자만이. ⠀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다는 말 이것밖에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 ⠀ 내심 마음에 걸려 건네는 응어리진 한없이 부어도 도무지 차지 않는 사랑을 쏟아본 사람은 안다 응어리진 채 풀리지 않은 미안함을 가슴에 묻고 살다 그제야 아주 조금 숨 돌릴 틈에 자그마한, 조막만 한 마음 건네며 미량의 죄책감을 털듯 뱉어내는 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안다 ⠀ 나 그제야, 잘려나간 손톱만큼 어머니 마음 헤아려본다 ⠀ 손톱 조각/ 이 솔로몬 https://www.instagram.com/p/B6IrFyNldO7/ ⠀
#10. 글, 어수룩한 고백 "저는 25살이고요. 그냥 뭐 놀고 있습니다." ⠀ 예비군 훈련을 받던 중 주어진 자기소개 시간, 한 청년의 용감한 고백.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생각들과 어수선한 정적 ⠀ 25살은 꿈을 가지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30살은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하나 35살은 만나는 사람이 있어 결혼해야 하나 40살이 되면 자식이 있어야 하나 ⠀ 이 모든 것을 다 갖추면 멋지고 일반적인가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시대에 뒤처지는 삶을 사는 사람일까 기준을 정한 사람은 누구이며 과연 그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 행복이 종이를 재단하는 것처럼 깔끔하게 재단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직장이 없는 사람은 한숨 소리를 꿈이 없는 사람들은 혀를 끌어 차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그렇게 쉽게 정..
#9. 글, 집 만능주의 장갑에 바퀴벌레가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내 누이는 자지러지고 덩달아 벙찐 장갑, 입만 뻐끔 헐레벌떡 뛰쳐나온 어머니께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벌레를 잡아 불에 태우셨다 ⠀ 날이 추워지는 밤, 서먹한 가을이 밤바람에 슬그머니 으름장을 놓는 날이면 집이 없는 것들이 면면을 드러낸다. 더는 영위할 것이 없어 속절없이 쫓겨난 이들과 더러는 애당초 얼굴 없이 웃는 밤, 길어지는 그림자들도 있다. ⠀ 밀리고 밀려 저 높은 옥상까지, 떠밀리다 못해 드넓은 사거리 전봇대 위 목 맨 붉은 물감칠해진 마네킹까지, 죄다 그림자 진 얼굴이다. ⠀ 살기 위해, 살아야 했으므로 나는 그늘져도 딸린 식솔만큼은 노란 전구의 온기 속에 머물기를 바랐기에 아래로 떨어지고 위로 길어지는 투쟁. ⠀ 적적한 새벽 홀로 나와 서먹한 전봇대의..
#3.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여름에도 뜨거운 심장이며 겨울에도 뜨거운 심장인 당신을, 흙먼지 탈탈 털어내며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당신을 나사를 조이며 툴툴 거리는 당신을, 조이며 그 이마를 짚어주고 싶다 북서풍의 계절 모락모락 김은 나고 대파처럼 듬성듬성 푸른 청춘 떠있는, 당신을 소금을 치며 후추를 치며, 당신을 밤늦도록 모락모락 뜨거운, 당신을 한 그릇 다 비우고 싶다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정훈교 시를 쓰는 내게도 시는 어렵다. 언제부터일까 시가 우리에게 어려워진 게 하지만 예술이 어렵다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문학, 예술은 예술이다. 시를 쓰는 나는 그 어려움의 간극을 조금씩 메꾸며 마냥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여전히 어렵다. 시도 그렇다. 당신을 읽는..
#2.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글의 앞머리에서 아버지의 세발자전거를 잠깐 이야기했었는데요. 그때가 1953년이나 1954년 즈음입니다. 당시 며칠씩 생으로 굶던 처지의 어린 아버지가 갖기에는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 자전거는 사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한 물건이었습니다. 며칠씩 울기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는지 할아버지가 선물해준 것이지요. 분명 자전거도 좋았겠지만 '엄마'라는 것이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죽음은 누구에게나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준다. 시간에 모든 것을 맡겨본다는 것을 제외하고 큰 시련 앞에 감당할..